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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상식

LIFE 상식 (35) 조선 최초의 호텔은 왜 인천에 세워졌을까?

by 시간킬러 2021. 1. 18.

1. 조선인은 처음 커피를 보고 서양인의 한약으로 여겼다?

커피는 일제강점기 시절이었던 1882년에 임오군란 이후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전해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커피가 들어온 지 약 100여 년이 되었고, 현재엔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의 눈에 비친 커피는 어땠을까? 조선 말기의 개화사상가이자 정치가였던 유길준은 1890년대 한국인 최초로 미국으로 유학을 갔었다. 보스턴 대학교에 다녔던 유길준은 「서유견문록」에 우리가 숭늉을 마시듯 서양 사람들은 커피를 마신다고 썼다. 기록에 따르면 1910년 종로시장 상인들은 서양인들이 권하는 커피를 마셔 본 뒤 '양탕국'이라고 불렀다. 마치 한약을 달인 것처럼 검고 쓴 탕약을 닮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서양인들이 마시는 거라 '양탕국'이라고 이름 지었다.

2. 조선 최초의 호텔은 왜 서울이 아닌 인천에 세워졌을까?

조선 최초의 호텔은 대불호텔이다.

이곳은 1888년 개항기였던 시절 인천 제물포에 문을 열었다. 당시 선박을 상대로 물자 공급업을 했던 호리 리키타로가 세운 대불호텔은 무역을 위해 인천항을 출입하던 서양인을 상대로 근대적 숙박업을 경영했다. 붉은 벽돌 건물에 하얀색으로 칠한 나무 창문, 아치형 현관 2층 발코니 등 서양식 양식으로 지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1885년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의 비망록에 따르면 서양 음식을 팔았고, 호텔 종업원은 영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조선 최초의 호텔이었지만 대부분은 서양식이었다.

이후에 경인선 철도가 놓이면서 무역의 중심이 인천에서 서울로 바뀌자 인천의 숙박업은 쇠퇴하게 되고, 1919년엔 거의 폐업하게 되었다. 그 뒤 건물주가 수차례 바뀌다가 1978년 대불호텔건물은 철거되었다. 한동안 터로 남아 있었던 자리에서 공사가 시작되면서 2011년에 기단이 발견되었다. 건축물의 터를 반듯하게 할 때 쌓는 단이다. 이 터의 땅 주인이 마침 시에 땅을 기부채납을 해서 인천광역시 중구청은 2018년 4월 대불호텔의 옛 모습을 재현한 생활사 전시관을 세웠다.

조선 최초의 호텔이 인천에 세워진 이유는 이렇게 된것이었다.

3. 인천 차이나 타운은 원래 사교와 유행의 장소였다?

우리나라에 중국인들이 집단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1882년부터다. 구식 군대의 군인들이 신식 군대와의 차별대우와 민씨 일족의 전황 등에 불만을 품고 임오군란을 일으키자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청나라 군대 4000여 명이 인천을 거쳐서 서울 용산에 주둔하게 된다.

이때 군대에 필요한 물품들을 공급하기 위해 40여명의 군역 상인도 함께 들어와 부대 인근에 자리를 잡았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차이나 타운의 시작이었다.

1883년 인천한이 개항한 다음 해 4월 인천화상조계장정이 체결돼 지금의 인천시 선린동 일대의 약 1만 7000㎥ 대지에 중국 조계지가 세워졌다. 그해 10월 청국 영사관도 들어오게 되었다. 이때부터 인천의 선린동 일대에 중국인들이 문을 연 요릿집들이 생겨나고, 당시에 부자들을 위한 청요릿집도 생겼다. 단순히 음식만 파는 곳이 아니라, 사교와 유행을 위한 고급 식당인 셈이다.

한편 이곳에서 중국식 면장에 캐러멜소스를 섞어 한국식 춘장이 개발되었고, 바로 이 춘장으로 짜장면이 만들어졌다.

나중에 한국 정부는 '분식 장려 운동'등을 하며 이때 온 국민의 인기식인 짜장면이 히트를 했다.

4. 여성 전용이던 손목시계는 보어전쟁 때부터 남성이 사용했다?

유럽에서 19세기까지 손목시계는 여성만이 사용하였다. 유럽 왕실들의 여성 귀족을 중심으로 '리슬릿'이라고 불리는 팔찌 형태의 손목시계가 장신구로 인기를 끌었다. 이곳에 각종 보석이나 문양을 새겨 장식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당시 남성들은 회중시계를 주로 사용했었고, 남녀의 구분이 확실한 분위기라 남성에게 손목시계착용은 부끄러운 일로 여겼다.

그렇게 금기시 하던 일이 보어전쟁을 계기로 깨지게 된다. 보어전쟁은 영국이 남아프리카 일대 네덜란드계 보어인들과의 전쟁을 말한다. 이때 기관총, 수류탄, 현대적인 무기들이 처음으로 대량 사용된 본격적인 현대무기전으로 알려져 있다. 약 3만 명의 주민들이 학살된 끔찍한 전쟁에서 남성들이 손목시계를 사용하였다.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서 보고 다시 넣고 할 여유가 없었기에 이때부터 남성들도 손목시계를 사용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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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상식으로 두뇌의 숨은 힘을 깨워라. 1분 생활상식'. 별글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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