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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상식

LIFE 상식 (33) 감자는 유럽인들에게 악마의 식물로 불렸다

by 시간킬러 2021. 1. 16.

1. 300년 동안 감자는 유럽인들에게 악마의 식물로 여겨졌다

현대인의 식탁에 자주 사용되는 필수 식재료중 하나인 감자. 감자의 고향은 수백종의 야생 감자가 자라는 안데스산맥의 고원이다. 이곳을 정복한 에스파냐인들은 16세기 후반 감자를 에스파냐를 비롯한 유럽으로 가져갔다.

감자를 처음 본 유럽인은 감자를 별로 반기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 나쁜 식물로 여겼다. 왜그랬을까? 그 당시의 감자는 현재의 것과 달리 알이 작고 울퉁불퉁했으며, 잘라두면 흰 살빛이 금방 검게 변했다. 맛은 쓴맛이 났으며, 혀를 자극하는 독( 훗날 솔라닌이란 성분으로 밝혀짐)이 있었다.

이것이 나병을 생각나게 했는지, 감자를 먹으면 나병에 걸린다는 소문까지 돌랐다. 프랑스 동부의 브르고뉴 지방에서는 공식적으로 감자의 식용이 금지될 지경이었다. 

종교적인 편견도 영향을 미쳤다. 성경 창세기에는 먹어도 되는 식품과 먹어선 안되는 식품이 기록되어 있는데, 감자는 적혀있지 않았다. 중세 이래 유럽인은 땅을 지옥, 지상을 연옥, 하늘을 천국으로 여기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고, 동식물의 가치도 이에 따라 평가를 하곤 했다. 예를 들면 땅에서 나는 식물은 가치가 낮아서 농민들이 주고 먹었고, 나무에 달린 과일은 하늘 높이 솟아 있어 귀족들이 먹었으며, 하늘을 나는 꿩이나 자고새 등은 최고 가치의 식품이었다. 

따라서 땅 속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린 감자는 악한 식물로 여겨졌다. 천대 받던 감자가 이후에 유럽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300년이나 걸렸다. 이젠 악마의 식물이란 오명은 벗은듯 하다.

2. 독일의 위대한 프리드리히대왕의 별명은 왜 감자 대왕이었을까?

프리드리히 대왕은 독일에서 무척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이다.

1618년 시작된 30년 전쟁 등 당시 벌어졌던 유럽의 전쟁에서 독일을 구해냈을 뿐만 아니라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군주론을 강조하고, 실천하는 등 오늘날 독일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나 위대한 그의 별명이 '감자 대왕'이었다. 1750년~1770년 프로이센에서는 흉작이 잦았다. 이때 대왕은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외국에서 감자를 들여와 생산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곳의 농부들은 감자가 구루병이나 결핵을 일으킨다는 미신을 믿고 있었다. 이것을 타파하기 위해 대왕은 매일 감자를 먹으면서 안전하다는걸 행동으로 보여주게 되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의 의심은 점차 사라지고 감자를 먹기 시작했다.

이 일을 계기로 프로이센엔 굶어 죽는 사람이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고, 인구가 증가했다.

이후 독일인들은 감자를 주식으로 먹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직후의 기록에 따르면, 독일인 1인이 연간 200kg의 감자를 섭취하였다. 2010년 기준으로 세계의 연간 소비량이 평균 70kg인데 이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양이다. 현재의 독일은 세계 상위권의 감자 생산국이기도 하다.

3. 조선 시대 여성에게 최고의 사치품은 가발이었다

조선 시대 여성에게 최고의 사치품은 바로 가체였다. 요즘으로 치면 가발에 속하는데 사극에서 많이 봤을 것이다.

머리카락에 덧붙이는 장식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당시의 여성은 머리에 가체를 얹어 머리카락을 풍성하게 보이게 했다.

처음엔 왕실과 상류층만 사용했다. 당시의 기술로는 진짜 사람 머리카락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 가격이 매우 비쌌다. 특히 조선 시대는 예의범절상 머리카락을 함부로 자르지 않았던 시대라서 가체 자체가 상당히 귀했다. 그러다 조선 후기가 되자 서민도 즐겨 착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농업과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서민의 경제력도 커졌기 때문이다.

가체를 찾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가격이 오르기 시작했다. 

기록을 보면 영조때 쌀 한가마니 값이 3냥이었는데, 가체는 60~70냥이나 했다. 정조 때는 1000냥쯤 될 만큼 가체의 가격은 급격히 상승했다. 결국 영조와 정조 때 가체 사용을 금지시켰다. 너무 무거운 가체 탓에 그 무게에 여성의 목뼈가 부러져 죽는 사건도 발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지위와 부의 상징물이 된 가체의 유행을 막을수 없었고, 많은 여성들이 사용했기에 금지령을 내렸어도 처벌하기가 힘들었다. 조선 시대 여성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사치품이었던 가체는 19세기에 들어 잠잠해졌다. 순조때부터 쪽 찐 머리가 유행하면서 부터다.

4. 네덜란드 튤립 한송이가 집값보다 비쌌던 시절이 있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튤립에 관심이 많았던 식물학자 카롤루스클라시우스는 연구 끝에 두가지 색이 나타나는 튤립을 개발해서 판매하였다. 그 가치가 높아서 사고자 하는 사람이 많아져 가격이 치솟기 시작했다. 그러다 1636년 튤립 알뿌리 하나가 1만 길더, 네덜란드에서 최신 수로, 차고, 정원을 갖춘 집 한 채와 맞먹는 가격이 되었다. 이 과열된 현상을 '튤립 버블'이라고 한다. 실제 가치보다 지나치게 높은 가격이 형성된 상태를 가르킨다. 당시 튤립 버블은 결국 꺼지고 마는데, 지나치게 높아진 가격탓에 사람들의 관심이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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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상식으로 두뇌의 숨은 힘을 깨워라. 1분 생활상식'.별글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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