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급 샴페인 돔 페리뇽은 원래 수도사의 이름이었다?
프랑스 최고급 샴페인의 대명사로 알려진 돔 페리뇽. 프랑스 최북단의 샹파뉴 지역에서 생산되는 스파클링 와인인 중에서도 최고의 제품을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원래 사람 이름이었다. 17세기만 해도 샹파뉴 지역에서는 일반적인 와인이 생산되었다. 그런데 이곳은 프랑스의 다른 와인 생산지보다 조금 추운 기후여서 봄마다 와인에서 탄산가스가 발생하는 문제가 있었다. 때로은 탄산가스가 심하게 나와서 병을 깨뜨리는 일까지 일어나자 이를 해결하는 임무를 맡아 파견된 사람이 바로 페리뇽이라는 수도사였다. 그는 오랜 연구 끝에 샹피뉴에서 생산된 와인에 맞춰 탄산가스의 압력을 견디는 유리병과 코르크 마개를 찾아냈다. 그리고 탄산가스가 많은 스파클링 와인의 특성을 살려 품질 좋은 샴페인을 생산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자 샹피뉴 지역의 사람들은 감사의 의미로 이 고급 샴페인에 수도사의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2. 중국 차 덕에 탄생된 영국의 명품 브랜드가 있다?
차는 커피, 코코아와 함께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기호음료중 하나이다. 차는 기원전 2700년경 전설로 전해오는 중국 황제인 신농씨 때부터 마셨다고 한다. 이렇듯 긴 세월 동안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중국 차 덕분에 멀리 떨어진 영국에서 탄생한 명품들이 바로 선박과 도자기이다. 1560년 중국차와 차 문화는 실크로드를 통해서 중국을 다녀간 포르투갈 선교사가 유럽에 첨으로 소개하였다. 이때 영국에도 차가 전해졌는데, 1640년 영국 최초의 홍차 가게가 생기면서부터 대중 사이에서 차는 급속도로 인기가 높아졌다.
이후 영국에서는 빠른 범선의 개발이 이루어 졌는데, 차를 되도록 싱싱한 상태로 운반해서 높은 이윤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차를 담는 중국제 도자기가 인기를 끌어 도자기 수입도 크게 늘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중국산 도자기를 '차이나'라고 불렀는데 이를 본떠서 강도가 높은 '본 차이나'가 만들어진 것이다. 1759년에는 영국의 본차이나 도자기를 대표하는 브랜드 웨지우드가 탄생되었다. 웨지우드는 품위 있는 디자인을 내세워 유럽은 물론 세계 각국의 도자기 산업에 영향을 주는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하였다. 중국 차문화와 도자기 덕분에 영국의 명품 브랜드가 탄생한 것이다.
3. 마르게리타 피자는 왕비에게 진상되었던 피자였다?
18세기 항구 도시 나폴리에는 수많은 빈민들이 살았다. 그들이 배를 채우기 위해 길거리 노점에서 주로 사먹었던 게 바로 값싼 피자였다. 당시 피자는 요즘의 피자와는 그 모습이 완전 달랐다. 얇은 도우에 마늘과 소금, 돼지기름 조각을 올린 간단한 먹거리였다. 전부 하얀색이라서 '피자 비앙카(화이트 피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래도 쫄깃한 식감이 있어서 그 맛에 사람들이 먹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오랫동안 여러 도시 국가와 주변의 식민지로 쪼개져 있었는데, 사부아 왕가가 다스리던 세르데냐 왕국을 중심으로 통일하게 된다. 그 뒤 1889년 통일 2대 황제의 움베르토 1세가 부인인 마르게리타 왕비와 나폴리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때 이들은 이탈리아 음식을 맛보고 싶어 했고, 당시 유명 요리사가 황제 부부의 방문을 환영하는 의미에서 마르게리타 왕비의 이름을 붙인 피자를 개발하였다. 바질과 모차렐라 치즈, 그리고 토마토소스를 활용해 녹색, 흰색, 빨간색으로 구성된 이탈리아 국기를 상징하는 피자를 만들어 대접하였다. 이 피자는 왕비의 이름을 따서 마르게리타라고 불리게 되었다.
4. 유럽 사람들은 죽어서도 세금을 내야 했다?
유럽의 중세 시대 또한 지배층이 피지배층에게 거두는 악랄한 세금이 많았다.
그 가운데 '사망세' 는 특히 백성을 힘들게 했다. 당시 유럽은 봉건사회로 왕과 귀족, 영주와 같은 지배층이 있었고, 이외에 지배층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기사, 지배층의 영토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농노가 있었다.
전체 인구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농노는 영주의 보호를 받는 대신에 영주에게 부역이나 노역을 상납하면서 생활을 하였다. 원칙적으로 충분한 자금을 모으면 자유민으로 신분을 사들이는 방법으로 신분 상승이 가능하긴 했지만, 현실적으론 거의 불가능했다. 일단은 그만한 재산을 모으는 게 힘들었다. 농노의 재산은 원칙적으로는 아들에게 상속할 수 있었으나 영주는 이들이 사망하면 유족에게 '사망세'를 징수해 재산이 많거나, 이것으로 신분상승을 노렸던 것을 완벽히 막아버렸다. 사망 세는 재산의 33~50%를 차지할 만큼 거액이었다. 게다가 재산으로 세를 못 낼 경우에는 소유하고 있던 가축을 대신 가져갔다. 결국엔 유족들은 살길이 막막해지고, 다시 농노의 삶으로 계속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근대화되어 농노가 해방되면서 사망세는 점차 폐지되었는데, 프랑스의 경우에는 프랑스혁명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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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상식으로 두뇌의 숨은 힘을 깨워라. 1분 생활상식'.별글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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